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문단 편집) === 고종의 청군 파병 요청과 외세의 개입 === ||[[파일:external/collection.nl.go.kr/50_02.jpg|width=300]]|| || 전주성을 공격하는 경군 ||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완산에 진을 치고 있던 [[홍계훈]]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수습하고 병력을 보강하기 시작했으나, 초기에는 공주로 대표되는 수비선을 지키고 병력을 재규합 시키느라 못하고, 나중에는 아산의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 공주에 발이 묶여 있다가 5월 초에 전주성을 공격하여 8일만에 탈환하였다. 함락이 눈 앞에 놓이자 동학군 수뇌부는 미리 도망쳤고, 탈환 당시 전주성과 그 주변에 남은 것은 동학난을 진압하러 온 경군들과 경군들에게 패배하여 살기 위해 흩어진 동학군 잔당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초기 관군이 무너지고 전주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조선 조정은 크게 동요하여 자국군의 역량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말려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으로 인해 이후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내부의 분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에 도움을 요청하면 십중팔구 이용만 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이며, 특히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였으니, 한 마디로 "날 잡아 드십쇼" 꼴이 되어 버렸다. 일단 농민군은 주력이 관군의 반격을 당해 음력 5월 초부터는 오히려 전주성에서 쫓겨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5월 8일에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이 반격해서 동학의 주력을 털어버리고 전주성 남문을 통해 전주성을 탈환하였고, 동학의 지도부들은 도주하였다. 남은 것은 도망치지 않고 버티다가 도망친 동학의 잔당뿐이었다. 청일 양군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늦어도 8월 안에는 완전히 끝나고 뒷정리까지 대강 끝났을 것이다.] 강력한 청군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단숨에 농민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고종이 직접 청병의 파병안을 제기하였다. 이에 김병시가 [[톈진 조약]][* 청과 일본 사이의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조항이 있어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면 마찬가지로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조약이었다.]에 의거해 [[일본군]]이 진입할 빌미를 내줄 수도 있다고 강력 반대하며 경고하였으나, 고종과 민씨 일족이자 실권자였던 [[민영준]]이 "청군이 먼저 들어올 텐데 일본군들이 어떻게 감히 이럴수가 있단말인가?" 하고 상큼하게 무시해버렸다. 또한 파병을 적극 찬성하는 민영준은 파병을 반대하는 대신들에게 "청나라 군대가 오면 청나라 속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선의 정권을 계속 우리들이 잡을 수 있다. 동학군에 의해 정권을 잃는 것보다는 청나라의 속국이 되더라도 계속 정권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파병 반대를 외치는 대신들을 회유하거나 무력화시켰다. 또한 민영준은 원세개와 비밀리에 접촉까지 하여 청군의 파병을 직접 요청까지 하였다. [[파일:청병 차용.jpg]] 게다가 고종은 이미 보은 집회가 열렸던 당시부터 "서울 병력을 빼는 건 힘드니까 외국 군대 동원해서 막자"고 말하고 있었다. 과거에 청나라가 [[영국군]]을 빌려서 난을 진압한 적이 있었다고 하던데[* 아마도 [[태평천국의 난]]을 말하는 듯 한데, 이는 고종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영국]]이 청을 지원한 것은 청을 짓밟고 불평등 조약 체결을 강요한 1860년 이후이며, 이 때의 청은 외세의 군사력 지원도 없이 회군과 상군을 동원해 내분으로 약해진 태평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았다. 다만 [[찰스 조지 고든]]을 비롯해 영국-프랑스 군인들이 용병 형식으로 청군을 지휘하거나 지원한 적이 있다.]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누구보다도 먼저 말을 꺼낸 것. 그때는 대신들의 반대와 어윤중의 회유가 먹혀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이미 예견되어 온 일이었던 것이다.[* 외국군을 끌어들였다가 그로 인해 외부의 내정간섭을 받게 되는 일은 세계 역사상 비일비재했다. 과거 유대 왕국은 자신들의 내분 과정에서 로마군을 끌여들였다가 유대 왕국 자체가 로마의 속국으로 떨어져 버렸고,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기에 선비족을 끌어들이거나 당나라 후기에 위구르인들을 끌어들였다가 많은 낭패를 보았다. 한반도에서도 신라가 고구려군의 지원으로 위기를 극복한 대신 고구려의 속국으로 떨어졌으며, 가야 연맹 중 안라국이 백제의 지원을 기대했다가 오히려 백제의 간섭을 받는 처지로 떨어졌다. 게다가 저런 사례들과 달리 이 일은 외국과의 전쟁 과정에서 제3국을 데려오는 것도 아니고 국내 반란 진압에 외국군을 데려오는 것이니 문제가 더 심각하다. 괜히 신하들이 일본군의 개입을 우려한 것이 아니다.] 나중에 조선왕조실록에 지석영의 상소문을 보면 민영준(민영휘)이 원병을 불러들이게 만들었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원세개의 군대 파병에 민영준이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이 동학란은 어디까지나 조선 내부 문제이기 때문에 타국인 청나라나 일본이 명분 없이 관여하는 것은 침략 행위이다. 즉 명분 없이 타국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불법이고 처벌 대상이라는 것이다. 민영준의 경우에는 민씨 일족 중에서 다른 민씨들이 친청에서 친러로 전향할 때 유일하게 친청 성향을 유지해서 원세개하고도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학란 당시에 고종과 함께 주도적으로 청군의 파병을 요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거기다 민영준은 당시에 병조판서로 군사 관련 업무까지도 담당하고 있었다. 여튼 중국과 일본 측 기록까지 보면 파병이 성사된 주범은 고종, 민영준, 원세개 셋이다. 그리하여 1894년 5월 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게 된다. 하지만 고종과 대신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로 다음 날인 5월 6일, 일본군이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톈진 조약]]을 명분으로 들며 전격적으로 [[인천|제물포]]에 상륙한다. 동학농민운동은 오늘날의 전북 지방에서 일어난 봉기이므로 이를 진압하려면 남부 지방에 병력을 보내야 하고, 실제로 청군은 [[아산만]]에 병력을 보냈는데 일본군은 엉뚱한 제물포(인천)에다가 군을 상륙시킨다. 이는 농민군 진압 따위는 알 바 없고 한성 장악이 우선이었다는 강력한 반증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